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에 맞게 4월 3일
제주도 무력 충돌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
추념일을 알아볼까 합니다.
저도 사실 오늘 네이버에 추념일을
뜨는거 보고 알게되었는데요.
몰랐던걸 알게 된다는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47년 3월 1일,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1947년 3월 1일, 제 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 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떄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끊기 시작했다.
제주 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경찰이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다. 본토에서 응원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과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하여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정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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